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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사회, 분노 사회로, 장하성 교수 강의 정리

권희찬 2016. 9. 5. 01:08

어제 베프들과 술자리에서 작은 정치적 논쟁으로 언성을 높였고, 나름 좀 더 공부를 했다는 나의 작은 자만심은 내 부족함이 크다는 것만 알려주는 계기였다. 내 옆에 가장 친한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더 알리고 설득하려고 하겠는가.

어제 논쟁은 크게 3가지였고,
 1. 경제가 활성화 되면서도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어떤 방법이 있느냐.
 2. 그 해결책이 기업에게 세금을 걷는 것이냐, 투자를 늘리게 하는 것이냐?
 3. 그런 의사를 밝히는 게 투표라면, 왜 투표를 하는 데 있어, 새누리당이나 보수세력들이 최악의 선택인가?

먼저 2주전쯤, 둘이 만나 잘 하지않던 정치얘기를 꺼냈었고, 노동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 "노동개혁이 필요하냐?"
 친구: "응 필요하지, 일못하는 사람들 나가야하는게 당연한거 아니냐?"
 "10년 뒤 니가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데, 아무리 일을 못한다고 평가가 난다해도, 그것이 해고사유가 되면 되겠냐?"
 "기업에서 효과적으로 돈을 벌어야 유지가 되는데, 그것이 중요하지."
 "기업의 이윤추구 권리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노동권이 의제화 된적이 없기 때문에, 노동의 책임과 권리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팽팽한 이야기 중에 전화를 받고 온 친구는 걱정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의 지인이 고용 계약과 달리 노동 시간을 강요하고, 일을 추가로 더 받는 일이 생겨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너 지인이랑, 잘려나가는 사람들이랑 무슨 차이가 있냐. 노동권이 없기 때문에 고용자도 아닌 고용된 상사가 그렇게 맘대로 노동시간을 강요하는 거다. 이런 상태인데, 자유로운 해고마저 생기는 노동개혁이라는 법이 통과되면 어떻게 될까 걱정되지 않냐?"
 "그러네" 

 어제 만남에서는 sbs 스페셜 [엄마들의 전쟁]에서 - 요새 sbs가 가장 공영방송이라고 농담(?)하며 웃었다. - 일하는 여성 고용형태가 얼마나 안정적이고, 엄마 맞춤형으로 되어있는지 얘기하면서,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 노동권에 대한 문제때문이라고 다시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왔다. 나는 그러면서, 절대로 노동개혁 입법을 하는 정부나 정당, 그들에게 투표라는 것으로 반대하며 적극적으로 분노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논쟁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야당은 더 최악이야. 뭐 정확한 정책으로 보여주는게 어딨냐?"
친구는 논리적이고 양적인 근거, 정책까지 찾아보며 투표를 하고 있었다. 나는 덮어놓고 혹은 감정적인 선택을 일삼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친구는 "진짜 이번 정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야당은 더 못한다. 인물도 없고. " 

"언론을 좀 가려서 봐라. 노동개혁 등을 계속 반대하고 있는 정당이 있잖아. 나는 개인적으로는 노동자였던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정의당을 지지하는 게 맞지만, 정치는 최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극우와 수구가 몰려있고 노동개혁 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게을러지고, 청년들이 일자리를 못었는다는 어불성설하는 당을 뽑아야 겠냐?"

"난 보수성향인데, 뭐를 보여줘야 움직일꺼 아니냐? 그런 상태에서 둘다 별로라면 난 움직일 필요가 없지. 뭘 보여줘야 할꺼아냐?"

"그 경제는 잘한다는 보수 정부가 들어와서 실질성장률이 최악이었던거 알지? 작년은 실질성장률이 마이너스였던 것도 알꺼다. 그런데 무슨 경제를 살린다고 규제 다 풀고, 쓸떼없는 개혁이나 하고 그런 정당이 최악아니냐?

여기서 첫 번째 논쟁이 나온다.

 1. 경제가 활성화 되면서도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어떤 방법이 있느냐.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는 생존과 존엄의 문제이다. 경제적 성장은 보수든 진보든 - 개인적으로 경제적 성장이 꼭 되어야 하는가라는 고민도 많이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목표이다. 게다가 성장과 분배는 꼭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성장과 분배를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는 생존과 존엄의 문제이다. 경제적 성장은 보수든 진보든 - 개인적으로 경제적 성장이 꼭 되어야 하는가라는 고민도 많이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목표이다. 게다가 성장과 분배는 꼭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식되어왔다. 물론, 주류경제학에서는 분배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완전경쟁시장이라면 모든 경제주체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거 균형점을 찾아서 수요,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과 분배가 연관이 없다는 것은 케인즈의 소득주도 경제 성장에서 무너졌다.

 총소득 = 가계 + 기업 + 정부  라고 할 수 있다.

 친구와 내가 만난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기업이 투자를 통해 돈을 더 버는 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경제 성장의잣대가 되는 GDP라고 하는 제한된 지표는 “최종 생산물의 가치”를 달러로 나타낸다. GDP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이나 투자가 아닌, 바로 개별 경제주체들 간에 얼마나 돈이 도느냐이다. 내가 음식점에서 2만원을 쓰고, 음식점 주인이 그 2만원으로 커피를 2만원어치 사먹고, 커피집 주인이 2만원으로 책을 사면, 돈은 2만원만 왔다갔다 했지만, GDP는 8만원으로 책정된다. 경제에서 순환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가계 소득은 최악이며, 가계 부채는 1300조를 돌파하고 있다. 대부분의 가계부채와 정부부채대비, 기업은 700조에 육박하는 사내 유보금과 대기업 중심의 당기 수익률로 인해서 돈을 버는 기업은 있으나, 돈을 쓸 수 있는 가계의 소득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경제는 활성화될 수 없다. 흔히 이야기하는 낙수효과는 발생하지 않는다. 논쟁에 대한 적절한 강의를 장하성 교수의 "정의로운 자본주의는 가능한가?"라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강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장하성 교수는, 정치의 문제는 정의로운 분배의 문제라고 정의내렸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모든 부분에서 정당하고 공정하다는 지표는 낮은 상황, 그가 말하는 정의로운 분배와 자본주의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와 대만을 제외하고 제3세계에서 이런 경제발전을 이룬 역사는 드물다. 물론 차관과 베트남전쟁이라는 어쩌면 부끄러운 방법으로 종잣돈을 마련했다 할지라도,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속도는 서서히 감소하고 있다.  

장하성 교수는 그럼에도 경제성장과 실질 임금의 격차가 심각한 것이 현재 성장을 못하게 하며, 불평등한 사회가 되는데 가장 큰 폐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클린턴이 말한대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했던 것만을 따라 살 수 없지만, 경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더디더라도 약 10년간 24.5%의 국내 총생산 증가가 있었는데도, 실질임금 증가율 - 물가상승을 뺀 임금 증가 - 은 4.8%에 머무르고 있었다.  

게다가 기업에서는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이 낮다고 난리인데, 그것은 단위 시간당 생산성의 문제이며, 단위 시간 곧, 노동시간이 엄청나게 긴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노동생산성이 낮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저 표에서 우리나라의 노동환경이 스웨덴과 미국의 60여년 전 - 게다가 그것도 통계가 존재하는 최초의 년도 - 보다 못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현실이 아닌가.

앞서 말한대로, 노동 시간도 긴데, 임금 소득도 매우 낮아, 기업부채와 가계부채의 비율은 심한 격변기를 보였다. 1980년대, 기업의 부채가 480% - 김대중 정부에서 IMF이후 200%로 줄이라고 명령했었는데, 기업은 굉장한 반발을 보였다. - 이었다가, 지금은 100%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감소했다. 기업은 돈을 벌어 새로운 투자를 하지 않고 기업내에 유보금을 가지고 있다. 기업은 일부 오너의 것이 아니다. 가계부채는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이것은 대부분 부동산이라는 먹을 수도 쉽게 움직이지도 않는 블랙홀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장하성 교수는 이런 가계 - 기업의 부채 비율의 차이는 곧, 소득의 불평등과 근로 조건 - 비정규직, 파견제등 현재 노동개혁에서 친 기업형으로, 혹은 청년 일자리를 준다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로 - 의 차이이고, 곧 고용불평등이며, 이런 고용 불평등은 기업의 소득이 몇 몇 대기업에 몰린다는 기업간 불평등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약간의 순환을 가질 수 있는게, 대기업 - 원청 - 2차 하청 - 3차 하청 기업의 임금이 순서대로 감소하고 있으며, 또한 임금의 감소와 기업의 이익 편차는 그대로 들어맞게 된다. 여다시 고용은 불평등해지며, 중소기업은 일할 사람이 없고 대기업에만 엄청난 사람들이 몰리게 되는 이유가 된다.  

어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미국이 아메리카드림을 이뤘던 이유를  장하성 교수는 소득불평등을 해소했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물론, 일면 그들이 2차대전의 격전지였던 유럽에 있지 않고, 교전 상대국이면서 교전지가 아니었고, 엄청난 군수품 수출을 통한 경기 부양이 되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 루즈벨트 대통령은 "최저 임금을 올리고, 최고 임금에 제한을 두는" 정책을 법으로 만들었다. 이는 우리나라가 박정희가 죽었을 시점, 이미 경제가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시대까지 국가 경제가 3저 호황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이런 경제적 성장의 성과를 노태우 정부들어 임금이 약 2배 증가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이 계속되었다는 사례를 그대로 적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이런 불평등 상황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며, 친구와 이야기 했던 성장이 되는 것이 기업이 잘되서 투자를 늘리는 효과는 없으며, 임금을 통해 소득주도의 성장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게다가,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곧, 국민연금이라는 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전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테크윈인가 제일모직의 합병에 대해서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에 도와달라고 했던 신문기사가 있었고, 국민연금은 이재용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수천억의 피해를 보았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녔던 국내 최대기업 삼성에서는 쉽게 "오너 회사 잖아"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 말도 안되는 것을 믿었던 나는 회사 의사결정에 있어 회장의 이야기를 무슨 신의 명령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행동에 반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실제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자동차의 최대주주는 국민연금이며, 국민연금은 모든 국민의 돈을 운용하는 단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편협한 오너체제의 논리는 개혁되고 비판받아야만 한다. 장하성 교수는 노동,재벌,구조 - 틀릴 수도 있으나 - 개혁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효과는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당연히 해결책이야기로 넘어갈 수 밖에 없고, 이는 친구와 나의 논쟁거리에서 만난다.
2. 그 해결책이 기업에게 세금을 걷는 것이냐, 투자를 늘리게 하는 것이냐?
친구도 경제가 성장도 중요하지만, 돈을 소비할 수 있는 임금을 올리는 것, 그래서 소비를 활성화 시키는 것도 - 인문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소비따위도 성찰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서도 - 중요한 국민경제 성장의 지점이라는 것에는 공감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 무엇이냐 에서 내 잘못이 있었다. 임금을 올려서 소득주도 경제성장을 이뤄야 한다는데 공감하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내 실책은 감정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에 있었고, 야당에서 주로 정책없이 이야기 했던 비판을 위한 비판이 어느정도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정부의 법인세 인하한 것을 다시 되돌려야 한다는 야당의 방향을 강조했다.  

 그러나 친구는 이런저런 데이터를 찾아가면서 - 물론 데이터는 그것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단점, 이면을 보지 못하는 점은 있으나 - 우리나라의 법인세율이 독일보다 높은 점을 들어, 법인세를 다시 올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얘기했다. 다시 법인세를 올리면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며, 국내 경제성장에는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인세의 기준을 동일한 경제상황이 아닌 나라와 비교한 것은 내 실책이었음이다. 그렇지만 법인세 상승으로 기업이 다른 곳으로 생산기지를 짓는 다는 것은 바로 연결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또한 심상정대표가 얘기했던 기업의 유보금을 1%만 조세로 걷어도, 고용을 수십만명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착안해서, 기업의 유보금 또한 부동산 보유세등을 올리는 것이 돈을 돌게 하는데 중요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친구는 그렇게 유보금에 세금을 걷는 사례가 있는지 질문했고, 나는 답하지 못했다. 아마도 기업 유보금을 걷는 사례가 있을텐데, 아직 확인해 봐야겠다.    

 마지막 세번째 논쟁에서는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3. 그런 의사를 밝히는 게 투표라면, 왜 투표를 하는 데 있어, 새누리당이나 보수세력들이 최악의 선택인가?

장하성 교수는 절망한 미래 세대, 한국사회의 희망은 없다고 말한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 이후에 3포세대가 곧 30대인 나를 가리킨다고 했다. 지금 20대는 N포세대가 되었고, 잉여세대라고도 불린다. 현실에 있어서 포기했고, 희망이 없기에 하루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루를 즐기며, 피로를 풀자는 것은 위로와 힐링이라는 일시적 처방으로 되는 것을 장하성 교수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루를 즐기자라는 말에는 나는 공감하는 편이긴 하나, 위로와 힐링은 나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 "먹고 살기 위해"다녔다고 하면서도, 그 노동의 수고와 조직의 압박을 겨우 주말의 술 한잔으로, 휴가철에 짧은 휴식으로 위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먹고사니즘에 빠져있지 않다면, 다양한 창조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고 눈치보는데, 곧 남의 틀에 맞춰사는데 보내면서 잠시 - 쇼핑 중독도 내가 지갑을 열 때만 기쁨을 느낀다 - 자기 위로같은 마약을 주는데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성세대 - 물론,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눈감고 1번을 찍는 기성세대가 너무 밉다는 성토도 했었다. 특히 가난하면서 그것을 가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은 뭐람 - 는 바꿀 필요가 없고, 젊은 세대는 이미 포기한 한국사회라는 말에는 상당히 가슴이 아팠다.

사회에서 만났던 40대들은 정말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회사 선배들은 상사 눈치, 가족 눈치를 보느라, 그리고 언젠가는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나이는 들어가면서 챙겨야 할 일들은 많아졌기에 자기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잊었다고 말했었다. 실종된 40대이다. 나는 삶을 포기하려 하지는 않지만, 유유자적 하며 살고 싶기도 했었다. 내 주위 몇몇 친구들은 포기했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가끔 강의에서 만나는 20대들에게 나는 강의하면서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부터 잉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너무나도 강한 경쟁과 작은 성공확률에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혹은 내것이 아닌, 기성세대의 틀에 맘에 들기 위해서 골몰해 있었다.

면접, 자기소개서 강의를 할 때 주로 취업준비생들은 "이런 말하면 안되는 것 아니예요?"를 가장 많이 묻는다. 면접, 자기소개라는 것은 자기를 당당하고, 솔직하게 보여주어야 함에도, 기성세대는 기성세대의 가치에 맞추기만을 바라고 있다. 나도 벌써 기성세대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당당하라고 말은 하면서도, 현명할 필요가 있다고 사족을 붙이기도 한다.

게다가 장하성 교수는 인문학도 굉장히 자기 성찰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힐링과 위로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계했다.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에 집중했다면, 그 나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하는 것은 인문학이 사회과학으로 확장되기도 하는 것을 보여주고, 20세기 현대 철학에 있어서 정치철학이 화두가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하성 교수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탓이 아니라, 세상의 탓이다"라는 문구를 이야기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무한 책임을 본인이 지지 말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대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쟁에 치어있으며, 살아남기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곧, 먹고사니즘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위해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의 실패를 나의 반성의 계기로 만드는 것도 매주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음에도 혹은 대부분 사람들이 최선을 다함에도 사회가 불평등하고 사람들이 행복해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나의 범위를 벗어난 세상에 대해서 성찰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을 장하성 교수가 강의에서 경제적 가치로만 이야기했다는 한계, 또한 그런 경제적 기준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살아가는 기본이라고 했었을 때 충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번째 질문, 노동개혁이나 정말 잘사는 0.0001%와 권력층을 위한 정당에 투표해서는 안된다고, 아무리 야당이 못하는 모습을 보여도, 방향을 한 번 봐주면 안되겠냐고 친구에게 말했다. 정치의 불신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함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음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선거제도의 개혁이라는 것과 결부된다. 1:1로 만나면 그렇게 매력이 넘칠 수 밖에 없다는 정치인들이 왜 저런 꼴을 보일까하는 것에는 그곳의 룰이 잘못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야하고, 그 룰을 고치지 않으려는 기득권들에 대한 정치적 운동, 혹은 분노로서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문의 목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불평등함을 알면서도 인문학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외쳤다. 사회가 불평등함을 알면서도 사회과학에서는 인간다운 삶, 모두가 행복한 삶, 평등한 삶을 외쳤다. 생존자체가 어쩌면 죽음을 향해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불행의 경로에서 그럼에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밥한끼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사람들과의 웃는 얼굴이 아니겠는가? 그 웃는 얼굴에는 소득 불평등의 해결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아래는 그 강의 풀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_JD_oVko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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