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대선]피닉제의 푸드덕푸드덕 본문
사실 우리는 이인제 전 의원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10년 민주정부는 없었습니다. IMF를 맞이한 후 바로 치러진 대선에서 이인제 전 의원이 없었다면 IMF를 오게 한 신한국당의 후보였던 이회창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인제 의원은 당시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선에 뛰어들었고 500만 표를 획득하면서 보수표를 분산시켰습니다.
IMF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비극입니다. IMF 이후 대한민국에는 신자유주의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종신고용제가 사라졌으며 '노동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은 이때부터 양산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IMF는 최악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회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당연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유권자들은 국가의 원수같은 신한국당의 후보를 다시금 대통령을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럴때마다 참 이 나라가 싫어집니다.
대한민국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인제 의원. 그는 대한민국 정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정치 인생을 보면 수많은 정당의 변천사와 역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인제의 당적 변경 역사>(자료- 시사인)
1990년 1월 / 통일민주당 → 민주자유당(3당 합당에 따른 소속변경)
1995년 12월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당명변경)
1997년 9월 / 신한국당 → 국민신당(대선 경선불복에 따른 탈당 및 신당 창당)
1998년 9월 / 국민신당 → 새정치국민회의(지방선거에서 독자세력화 실패 후 당명 변경)
2002년 12월/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대선 경선불복에 따른 탈당)
2006년 4월 / 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자민련과 국민중심당 간 합당 합의에 따른 선도 탈당)
2007년 5월/ 국민중심당 → 민주당(대선 출마 목적을 위해)
2007년 6월 / 민주당 → 중도통합민주당(김한길 계의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
2007년 7월 / 중도통합민주당 → 민주당(김한길계 집당 탈당 후 당명 변경)
2008년 2월 / 민주당 → 통합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
2008년 / 통합민주당 → 무소속(총선 공천 탈락 이후 불복)
2011년 10월 / 무소속 → 자유선진당(충청권 정치세력 결집, 이회창과 연대)
2012년 5월 / 자유선진당 → 선진통일당(당명변경)
2012년 10월 / 선진통일당 → 새누리당(흡수합당)
이인제 의원은 총 15번의 당적을 변경하였습니다.
<이인제 의원의 대선 도전 역사>
1. 19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41.1%)에게 패하고(14.72%)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 출마 / 3위
2.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대표 후보로 꼽혔으나 노무현 후보에게 패한 후 탈당 / 사실상 낙선
3. 2007년 민주당에 입당해 대선 출마 / 1% 미만의 득표율로 꼴찌
이인제 의원은 번번히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고, 수차례 당적을 옮긴 철새 정치인이었지만 국회의원 배지는 오랫동안 달았습니다. 총 24년, 6선 의원입니다. 지난 총선에도 출마를 하였으나 당시에는 낙선하였습니다.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런 그가 다시금 대선에 출마를 합니다. 이번 대선 도전은 총 4번째 대선으로 대한민국 역대 최다 대선 도전자가 됩니다. 4번 대권 도전 역사를 가진 사람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뿐입니다.
물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은 박근혜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 판타지와 같은 확률처럼 희박합니다. 이는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인제 의원의 대선 도전은 잊혀져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금 드러내고자 함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더이상 그를 찾지 않는데 어쩌죠?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보지도 못한 피닉제. 다시금 날개를 푸드덕푸드덕거리지만 날지 못하고 있습니다.